[신문기사][news1] 포장도 안해주는 '불편한 슈퍼마켓' 지구의 미래를 판다

포장도 안해주는 '불편한 슈퍼마켓' 지구의 미래를 판다

[기업, 사회와 함께③] 독일 '쓰레기 제로' 슈퍼 오리기날 운페어팍트

전제품 무포장 판매 사람들 몰려…한국서도 2곳 운영, 전세계 확산   /   (베를린·서울=뉴스1) 문창석 기자


독일 베를린 크로이츠베르크의 슈퍼마켓인 오리기날 운페어팍트(Original Unverpackt) 입구. © 뉴스1


"세계에서 제일 불편한 슈퍼마켓인데 무슨 취재할 게 있겠어요?" 지난달 10일 독일 베를린의 한 슈퍼마켓. 점원에게 한국에서 온 기자라고 밝히고 가게 안을 둘러보며 촬영하고 싶다고 하자, 옆에서 듣던 손님이 참견하며 말했다. 점원도 맞장구를 쳤다. "당신이 필요한 물건이 없을지도 몰라요." 취재를 하라는 것인가 말라는 것인가.

자신을 근처에 사는 대학생이라고 밝힌 오지랖 넓은 손님 바스티안 크루거는 점원의 말을 유쾌하게 받았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이 가게에는 모든 것은 없지만, 올바른 것은 있죠. 그래서 여기에 와요. 좀 불편하지만." 크루거는 점원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빌어먹을 야채 좀 제발 가게에 많이 가져다 놔요. 내가 더 자주 올 테니까."


◇쓰레기 '제로' 위해…포장 없이 상품 그대로 파는 슈퍼


이날 방문한 오리기날 운페어팍트(Original Unverpackt)는 일반적인 슈퍼마켓과 조금 다르다. '포장되지 않은(unverpackt)'이라는 이름처럼 제품을 포장하지 않고 날것 그대로 판매하는 슈퍼다. 소비자들은 곡물, 향료, 세제, 비누, 음료 등 600여 종의 상품을 살 수 있지만 점원은 이를 포장해주지 않는다.

이는 플라스틱 쓰레기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비롯됐다. 유엔(UN)에 따르면 전 세계 바다로 흘러드는 플라스틱은 매년 800만톤이다. 세계경제포럼은 이 상태가 지속하면 2050년에는 바다에 사는 물고기보다 플라스틱이 더 많아질 것이라고 경고한다.

최근에는 콧구멍에 빨대를 낀 채 발견된 코스타리카의 바다거북의 모습이 공개되면서 플라스틱 쓰레기에 대한 경각심이 일기도 했다. 한국도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유로맵에 따르면 한국의 1인당 연간 플라스틱 원료 소비량 순위는 조사 대상인 63개국 중 3위다.


콧구멍에 빨대를 낀 채 발견된 코스타리카의 바다거북(유튜브 캡처). © 뉴스1


실제로 소비자들은 물건을 살 때 자신도 모르게 많은 포장을 한다. 가령 마트에서 시리얼을 살 경우, 속 비닐에 들어있고 종이박스에 또 담긴 제품을 비닐봉지에 넣어서 들고 온다. 마트에서 집까지 시리얼을 가져가는데 3중 포장을 하는 셈이다. 오리기날 운페어팍트는 이런 포장재를 아예 없애고 시리얼 자체만 판매한다.

그럼 포장재가 없이 어떻게 물건을 사야 할까. 소비자는 스스로 용기를 가져와야 한다. 용기는 플라스틱 박스, 유리병, 종이봉투, 비닐 등 어떤 것도 상관없다. 소비자는 우선 자신이 들고 온 용기를 저울에 올려 무게를 잰다. 그리고 커다란 통에 담겨있는 시리얼·샴푸 등 상품을 그 용기에 필요한 만큼 담으면 된다.

용기를 계산대에 가져가면, 점원은 무게를 재 용기를 뺀 실제 상품의 무게만큼 가격을 매긴다. 혹시 깜빡 잊고 용기를 가져오지 않아도 괜찮다. 점원에게 요청하면 일단 가게에서 포장해 판매하고, 손님이 나중에 빈 용기를 가져오면 그 값을 돌려준다.


◇'환경' 내세우자 불편해도 손님 몰려…전세계로 확산


소비자는 포장재를 이용하지 않으니 그만큼 쓰레기는 줄어든다. 포장재는 전체 플라스틱 쓰레기의 절반가량을 차지하는 등 지구 오염의 주범으로 꼽히는 만큼, 환경과 관련한 사회적 부가가치가 창출되는 것이다. 특히 오리기날 운페어팍트는 유통 과정에서 낭비되는 비용을 줄이기 위해 해당 지역 업체가 공급하는 제품을 주로 판매한다. 지역 균형 발전이라는 가치도 창출되는 셈이다.

가격 면에서도 장점이 크다. 우선 기업은 포장재 비용이 들지 않아 더 저렴한 가격에 상품을 공급할 수 있다. 거기다 소비자는 자신에게 필요한 양만 살 수 있어 낭비가 줄어든다. 그래서 초기에는 대용량 제품을 혼자 쓰기 어려운 젊은 층 1인 가구들을 중심으로 입소문이 나기도 했다. 무엇보다 물건을 구매하면서 '환경을 아끼고 있다'는 자부심을 손님들이 받을 수 있어 충성도가 높아졌다는 설명이다.

이런 이유들로 오리기날 운페어팍트는 지역 명소로 자리 잡으면서 해당 지역인 크로이츠베르크(Kreuzberg)를 젊은이들이 자주 찾는 곳으로 떠오르게 했다. 조명래 환경부 장관도 이 사례를 배우기 위해 지난 5월 해당 슈퍼마켓을 직접 찾아 시찰하기도 했다.


조명래 환경부 장관(오른쪽)이 지난 5월15일 오전(현지시간) 독일 베를린에서 일회용 플라스틱 포장재를 사용하지 않는 마트인 오리기날 운페어팍트(Original Unverpackt)에 방문해 관계자로부터 일회용품 사용을 줄이기 위한 실천 노력 등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환경부 제공)2019.5.15/뉴스1


'환경'이라는 사회적 가치를 영업의 중심에 두자 경제적 가치도 따라왔다. 2014년 설립 초기에는 자본금이 없어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조그만 가게를 얻어 출발했지만, 이젠 수익금으로 기부도 하고 지난달 8일에는 베를린 시내에 더 넓은 두 번째 매장을 열기도 했다. 지역의 조그만 슈퍼마켓이라 일반 기업과 비교해 절대적인 수익은 크지 않지만 꾸준한 상승세다.


놀라운 건 이런 '제로 웨이스트(Zero-waste)' 모델이 사회적·경제적 성공을 거두자, 비슷한 방식의 슈퍼마켓들이 각지로 번지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의 '더 필러리(the Fillery)', 홍콩의 '리브 제로(Live Zero)', 영국의 '언패키지드(Unpackaged)', 프랑스의 '비오콥 21(Biocoop 21)' 등 전 세계적이다. 한국에도 서울 성수동의 '더 피커(the Picker)', 상도동의 '지구' 등이 같은 형태로 운영된다.



지난 28일 방문한 서울 성수동의 제로 웨이스트 슈퍼마켓 '더 피커(the Picker)'. © 뉴스1


◇소비자가 변했다…"조금 비싸도 지속가능하면 산다"


이런 모델의 슈퍼마켓이 성공하는 배경에는 소비자들의 의식 변화가 자리 잡고 있다는 해석이다. 지난 28일 방문한 더 피커의 홍지선 공동대표는 "가게를 시작한 4년 전에는 고객들에게 제로 웨이스트 모델이 생소해, 영업적인 면을 보완하기 위해 레스토랑도 같이 운영했다"며 "하지만 환경을 위한 소비 방식이 지난 4년 동안 고객들에게 확산하면서 가게를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해 최근 레스토랑 대신 슈퍼마켓 매장만 새로 문을 열었다"고 설명했다.

사회적 가치를 중시하는 소비자들의 이런 의식 변화를 기업이 따라갈 수 있어야 한다는 주문도 나온다. 이재열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그동안 소비자들은 제품의 경제적인 효율성을 보고 구매했지만, 이젠 제품이 얼마나 지속가능성을 가졌는지도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됐다"며 "전반적인 사회 변화가 그런 쪽으로 가고 있기에 기업들도 이를 예민하게 느껴야 한다"고 말했다.

송경호 더 피커 공동대표는 "저희가 내년이면 가게를 시작한 지 5년차인데, 환경 이슈가 불거질 때만 일시적으로 몰리는 게 아니라 꾸준히 오는 단계가 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런 방식의 소비가 상식에 동떨어진다고 느껴지는 아니라 얼리어답터처럼 받아들이게 된 것 같다"며 "그런 고객들이 SNS를 통해 제로 웨이스트 소비를 확산하고 거기서 영향을 받는 소비자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고 확실히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독일 베를린 크로이츠베르크의 슈퍼마켓인 오리기날 운페어팍트(Original Unverpackt) 가게 내부 전경. ©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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