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네이버 FARM] 비닐봉투 안쓰는 청년 식료품 가게 '더 피커'의 '쓰레기 제로' 실험


쌀 값보다 병 값이 더 들어도 좋다...

비닐봉투 안쓰는 청년 식료품 가게 '더 피커'의 '쓰레기 제로' 실험


쌀을 사려고 했는데 유리 용기밖에 없단다. 바나나를 집었는데 넣어갈 비닐봉투가 없다. 바로 이 가게만의 스타일이다. 쓰레기 없는 지구를 소망하며 플라스틱과 비닐을 없앴다. 환경에 유해한 포장을 배제한 그로서란트(grocerant, 식료품점과 레스토랑의 합성어) 매장, 더 피커의 이야기다.

한산한 어느 평일 낮 서울 성동구 서울숲 앞 골목을 찾았다. 꼬불꼬불한 길과 이를 따라 나란히 문을 연 힙한 가게들을 지나다 '더 피커'(성동구 성수1가) 앞에 멈췄다. 식료품점 겸 식당인 이곳에는 비닐봉투나 플라스틱 용기가 없다. 폐기물을 최대한 줄여 과대포장에 익숙한 소비를 막는다는 철학을 갖고 운영하기 때문이다. 고객은 친환경 농산물을 직접 가져온 장바구니에 담아가야한다. 송경호 대표는 "쓰레기에 적응된 '풀 웨이스트' 세상 속에서 '제로 웨이스트'를 외친다"고 말했다.




‘제로 웨이스트’를 표방하는 그로서란트 매장을 만들게 된 계기가 있나요?

어떤 상품이든 사자마자 버려야하는 것이 너무 많더라고요. 포장지 등에서 나오는 쓰레기들은 환경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이 계속 마음에 걸렸어요. 어떤 식으로든 해결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중에 폐지 재활용에 관한 사업을 구상할 기회가 생겼어요. 그때 쓰레기 문제에 대한 본질적인 의문이 생겼죠. '많은 분야에서 탄탄한 방법으로 이미 쓰레기를 처리하고 있는데 왜 이 노력들이 빛을 발하지 못할까?' 생각해보니 인류가 감당할 수 있는 능력 이상의 쓰레기가 하루에도 몇 톤씩 쏟아져 나오고 있더라고요. 아예 안 만드는 게 답이었죠. 그렇게 쓰레기를 원천적으로 발생하지 않는 공간인 더 피커를 기획했습니다.

손님이 직접 용기를 가지고 와야 곡물, 채소 등을 살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고객들의 반응은 어떤가요?

더 피커가 처음 문을 연 건 제로 웨이스트라는 개념 자체가 사람들에게 생소하게 여겨지던 2016년이었습니다. 그런 시기에 물건을 사려고 준비물이 챙겨와야 한다고 설명하는 상황이 긴장되지 않을 수 없었어요. 다행히도 이런 취지를 이해한 대부분의 고객들은 긍정적인 반응이었어요. 물건을 사고 비닐을 찾는 분들이 아예 없진 않았지만, 추구하는 방향은 항상 좋은 일이나 해야하는 일로 여기는 손님들이 많았습니다. 물론 원래 비닐봉투를 주던 매장이 갑자기 포장용기를 뺀 것이 아니라 아예 매장 자체가 특수하기 때문에 수긍하는 고객 비율이 높았을지도 몰라요. 그럼에도 더 피커에서 영향을 받아 꾸준히 환경을 위한 실천을 한다는 단골손님도 꽤 오세요. 운영에 힘이 되죠.

국내 최초의 포장재 없는 식료품점이라 가게를 처음 열 때도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특별히 기억나는 쓴소리가 있나요?

포장 없는 식료품점은 독일 베를린에서 가장 먼저 생겨났지만, 지구와 인류를 관통하는 쓰레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진 사업모델이라 한국에서도 잘 정착할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다만 한국의 특성이나 문화에 맞게 운영 방식을 바꾸는 과정이 어려웠습니다. 개업한 뒤 3개월 가량 가졌던 테스트 기간 동안 매출이 거의 나오지 않았죠. 고객 입장에선 물건 사는 방식도 생소하고 매장 전경도 낯서니까요. 국내외 사례도 적어서 자문을 구할 데도 없었습니다. 사업성이 없으니 청년 채소 가게로 컨셉을 바꾸라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답답한 마음이 앞섰는데, 신기하게도 비판을 받으니 레스토랑까지 같이 해야겠다는 아이디어가 떠올랐어요. 채소 가게 하니까 재료를 순환시키는 동시에 채식으로 인한 가치까지 전달할 수 있는 음식을 만드는 게 낫겠다 싶었죠. 지금은 잘 되는 편이예요. 다섯 명의 직원과 매장 앞마당에 상주하는 먹성 좋은 고양이 2마리가 행복하게 생활하며 살 정도입니다. 특히 매출이 잘 나올 수록 사회적 가치도 높아지는 가게 구조인 만큼 수익 창출에 힘쓰고 있습니다.

 더피커에는 친환경 농산물이 대부분입니다. 농산물까지 환경 친화적이어야 한다는 생각은 어떻게 하게 되셨나요.

전부는 아니지만 더 피커에서 판매하는 70~80%의 농산물은 친환경 인증을 받은 것들입니다. 가게 자체가 환경을 아낀다는 콘셉트이니 농산물도 같은 맥락에서 바라봐야 하니까요. 농사를 지을 때는 토양의 건강이 가장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그러려면 당연히 유기농법을 사용하고 농약이나 화학 비료는 지양하는 편이 좋고, 자연스럽게 친환경 농산물을 찾아다니게 됐습니다.

친환경 농산물은 어디에서 구하시나요?

포장 폐기물을 줄여야 한다는 철학을 존중해주시는 소농 한 분 한 분과 직접 거래합니다. 친환경 농부님들을 알아보고 일대일로 연락을 드려서 더 피커의 포장 방식을 설명하고 부탁드리는 과정을 거쳐요. 맨 처음 받을 때부터 소분 포장을 위한 비닐이나 플라스틱에 쌓여 있지 않은 농산물을 골라야하기 때문에 농부님들의 양해도 필요하죠. 더 피커의 시작부터 인연이 닿았던 분들과 지금까지 같이 가고 있어요. 농부, 요리사, 수공예가들이 모여 만든 도시형 농부시장인 '마르쉐'에 더 피커 물건들을 출점하기도 하는데 그곳에서 연락처를 교환한 농부님들도 많아요.

더 피커에는 농산물뿐 아니라 친환경 생활용품도 있습니다. 입점 상품을 꼽는 기준이 따로 존재하나요?

현재 판매하는 40여 가지의 리빙 제품은 홈페이지를 통해 입점 신청을 받습니다. ▲일회용품을 대체하기에 적합한지 ▲포장이 없어도 되는 상품인지 ▲쓰레기를 만들지 않는(Zero Waste) 소비를 위한 제품인지 ▲‘재사용’과 ‘생분해’의 범위 안에서 배송이 가능한지 등 필요한 조건이 여러 개 있습니다. 제로 웨이스트 라이프를 시작하시는 분들에게 꼭 필요한 제품들 위주로 매장에 배치를 해서인지 골고루 잘 팔립니다. 그 중에서도 일상 생활에서 쓰기 편하고 그만큼 환경 보호에 큰 영향을 주는 다회용 빨대나 그 세척솔, 대나무 칫솔이 가장 인기가 많아요.

비건 레스토랑도 함께 운영 중인 데요. 고기 없는 식당을 열기로 마음먹은 계기가 있나요?

가장 먼저 사람들을 매장으로 이끌 만한 매력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구매 방법이 지금까지의 식료품점과 달라서 매장에 들어오기 망설이는 소비자들을 더 피커로 초대할 계기가 음식이 된 거죠. 동시에 구매고객이 적어서 버려질 기로에 서있는 식료품을 시들기 전에 요리에 활용해 쓰레기를 줄인다는 이점도 있었고요. 또, 아직까지 채식이 낯선 한국 고객들에게 채식을 통해 또 다른 환경 가치를 알릴 좋은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비건 베이컨버거’나 ‘아보그린 샐러드’ 등 다양한 메뉴들이 SNS에서 입소문을 타는 중입니다. 신메뉴를 개발할 때 어떤 부분을 가장 고민하나요?

매장에 있는 재료들을 최대한으로 활용하는 것이 1순위 고려사항입니다. 그 다음은 당연하게도 맛과 비주얼을 많이 신경 씁니다. 지금은 채식에 대한 시선이 많이 바뀌었지만, 예전에는 채식을 건강하려고 맛을 포기한 행위로 여기는 사람도 있었어요. 사실 채식이란 그 자체로 탄소발생량이나 물 사용량을 손수 줄일 수 있는 과감한 실천인 동시에 인류가 더욱 건강하게 살기 위해 동물에게 무언가를 양보하는 일이기도 해요. 이렇게 장점이 있다고 해서 모두에게 채식을 강요할 수는 없죠. 베지테리언 디쉬라도 맛있고 예쁘다는 인상을 준다면 일반 고객들이 채식을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큽니다. 지금은 20여 가지 메뉴를 선보이고 있어요. 계절별 편차가 있지만 평균적으로 약 50~60명 가량의 손님이 방문합니다.

더피커 대표이기 이전에는 어떤 일을 하셨나요.

저는 군 전역 후 작은 의류 업체를 운영 했어요. 직접 회사를 굴려보니 사업을 하며 단순히 돈을 버는 것을 넘어 스스로 가치를 만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크게 들어 사회적 기업 분야를 다시 공부했죠. 더 피커를 시작하고 나서는 사업에도 생동감과 온기가 존재함을 느껴요. 일과 삶이 공과 사로 나누어지는 게 아니라, 일을 열심히 하면 내 인생도 변한다는 사실을 체감합니다. 더피커를 함께 꾸려가는 아내 홍지선 공동대표는 식수 위생 NGO단체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어요. 깨끗한 식수와 화장실처럼 인간이라면 당연하게 누려야 할 필수 요소가 결여된 채 사는 아프리카 난민촌이나 재해지역을 지원하는 직업이었죠. 해결이 될지 안 될지 불확실한 상황을 바꿔가는 일이라 막막했지만, 창업 이후에는 고민하고 있는 사회문제를 본질적으로 다룰 수 있는 삶에 성취감을 느꼈다고 해요.

앞으로 더 피커에서 팔고 싶은 물건이 있다면요.

식재료 뿐 아니라 쓰레기 없는 삶을 위해 필요한 모든 제품을 소개하려는 노력 중입니다. 현재로서는 법에 막혀 진열하지 못하는 소스, 음료, 세제 등의 액체류를 취급할 수 있길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대나무로 만든 대체품도 환영입니다. 플라스틱으로 인한 환경 오염에 대한 경각심이 커지면서 플라스틱을 대체하는 물건을 찾는 움직임이 큰데, 그 대부분이 옥수수나 쌀처럼 대부분의 나라에서 주식으로 먹는 곡식으로만 만들어진다는 게 아쉬워요. 제로 웨이스트라는 개념이 지금의 더 피커처럼 포장 없이 무언가를 파는 장소에만 국한되지 않고 제조나 유통처럼 많은 분야로 퍼져나갔으면 좋겠어요. 새해에는 도시 농업이나 도시 공동체에 제로웨이스트를 접목한 콘텐츠를 전달할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더 피커의 미래, 어떻게 보시나요.

평범한 가게가 됐으면 해요. 아직까진 독특하거나 이상해보이고, 비주류에 응원 받는 입장이지만 가까운 미래에는 꼭 더 피커가 아니더라도 제로 웨이스트와 관련한 사업이 많이 생겼으면 합니다. 우후죽순 일어나서 이런 사업이 신기하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요. 환경을 지키는 건 일반적인 문화와 시장의 당연한 조건이니까요.
식료품점에서는 난생 처음 사보는 유리 공병 속에 정갈히 담긴 퀴노아 한 병을 소중히 품에 안고 더 피커를 나서는 길. 지금껏 알던 채식과 환경 보호는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었던 모양이다. 행동이 아닌 생각을 바꾼다면 좁은 골목길 속 그들만의 영역을 넓혀가는 특이하지만 평범한 이 가게 또한 더욱 가깝게 느껴지지 않을까.



FARM 인턴 정영희
제작 총괄 : FARM 에디터 강진규
nong-up@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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